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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J가 접한 문화/책

경제적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짜잔! 두번째 독서 포스팅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지인에게 추천받은 책이에요~~

 

 

카트리네 마르살의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입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계실텐데요,

간단히 소개하자면,

'보이지 않는 손'이란 영국의 고전학파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제안한 경제 이론. 1776년 스미스의 저서 <국부론>에 소개되었다. 모든 경제 주체가 건전한 사회제도 아래서 경쟁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 질서를 가져오고 부와 번영을 이루게 된다는 이론이다. - Daum백과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개인입니다.

이 '합리성'에 의해 시장에서의 합리적인 가격이 책정되고, 경제 질서가 이루어집니다.

개개인을 보자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열심히 일할 뿐인데, 사회 전체를 보면 합리적인 개인들이 시장을 이루므로, 시장의 자연적 균형이 이루어지는 마법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것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제 개인들이 모두 합리적인 선택만 하지는 않을 것 입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예측 가능한 경제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단순화 시켰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경제적 인간'이라는 모델입니다.

 

 

 

 

경제적 인간이란??

경제 이론의 기초를 제공하는 개인의 본질적인 모델로 제시되었으며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순수한 경제 의식을 대변합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하지 않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움직입니다. 그는 가능한한 많이 가지려 하고, 궁극적으로 그의 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파괴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합니다.

 

<꿀벌의 우화>라는 책은 모든 꿀벌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벌집, 즉 공동체에 이익이 된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낸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욕심은 좋은 것 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경제적 인간처럼 이익과 효율을 추구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이로울겁니다. 아주 매력적인 이론 아닙니까?

 

하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말도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면, 그런 세상에 살고 싶으신가요?

 

1991년 로런스 서머스가 서명했던 메모의 내용을 봅시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세계은행은 환경에 해로운 산업을 저개발국으로 더 많이 이전하도록 권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아프리카의 인구가 적은 국가들이 오염도가 지나치게 낮다고 생각해왔다.…이런 저임금 국가에 유해 폐기물을 갖다 버리는 것은 흠잡을 데 없는 생각으로,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경제적 인간처럼 생각해봅시다. 가난한 나라에 유해 폐기물을 버리면 그들은 돈과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우리는 더 나은 환경을 즐길 수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거래입니다. 경제학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논리이죠.

 

그러나 브라질의 환경부 장관 호세 루첸베르거는 이렇게 반응하였습니다.

"당신의 추론은 완벽히 논리적이지만 완전히 미쳤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유해 폐기물과 함께 살아간다면 분명 국민들은 병들 것 입니다. 게다가 가난한 나라는 거기에 대해 장기적인 해결책을 개발하기에 교육 수준이 너무 낮습니다. 따라서 사회 전체적으로는 손해입니다. 이것이 합리적일까요?

 

 

경제적 인간의 선택은 오직 무인도에 고립된, 각각 필요한 것이 있는 두 명의 개인만을 봅니다.

맥락도, 미래에 대한 고려도, 연결 고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경제적 인간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 알지만, 여전히 그를 경제과학의 중심에 놓고 그 논리를 삶의 많은 부분에 계속해서 적용합니다. 시장 원리를 애정 문제부터 인간 생명의 가치까지 모든 곳에 적용하는 책 '괴짜경제학' 같은 책이 베스트 셀러를 꿰차고 있습니다.

 

카트리네 마르살은 8장 전체를 걸쳐, 아니 책 전체를 걸쳐 경제적 인간이라는 모델을 무참히 무너뜨립니다.

 

"지구는 사실 타원형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배를 타고 항해할 때는 지구가 완전한 구체인 것으로 가정하고 그린 지도에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구 표면의 불규칙한 면들을 측정하고, 어떤 식으로라도 그것을 지도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반면, 경제적 인간은 그냥 그대로 둔다....경제적 인간은 아주 좋게 말하면 ‘단순화된 인간’이고, 나쁘게 말하면 ‘환상’일 뿐"

 

 

경제적 활동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개별적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성적인 경제적인간이 시장을 구성한다'는 전제부터 틀려먹은 것 입니다.

 

그렇다면 사회가 이상적으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카트리네 마르살은 '돌봄'을 꼽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 아니라요.

정말 인상적이었던 이야기가 있는데 너무 길어서 이미지로 첨부합니다. 세 명의 여신과 세 개의 국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장을 이루는 우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태어난다. 그리고 서로의 안에서, 서로를 통해서 존재한다."

 

우리는 독립적인 상태로 삶을 시작하고, 이후 필요에 의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사는 데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며 그 필요성을 열거하는데,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요구와 기대로 둘러싸여 태어납니다. 어린이는 거의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누군가의 필요를 끊임없이 충족시킨다는 의미이고, 이 친밀함 안에서 아이는 한 걸음 한 걸음 독립하는 법을 배웁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는 타인에 대한 의존입니다. 그 껍질을 부수고 나와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과제입니다.

 

 

'돌봄 산업'은 '보이지 않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먹이고 재우고 빨래하고 숙제 봐주고 간호해주고 청소하고.

 

경제학자들은 여성들의 돌봄 노동을 당연시 해왔습니다.

그들의 노동은 GDP에 포함되지도, 주류 경제학 모델의 '생산 활동'에 포함되지도 않습니다.

애덤 스미스 또한 평생을 그를 돌보았던 어머니를 간과했지요. 

 

"보이지 않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이지 않는 성이 있다."

카트리네 마르살은 경제적 인간의 신화를 깨트릴 열쇠를 바로 여기서 찾았습니다.

경제학은 인간을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로 봐야 하며, 관계를 모든 것의 근본으로 봐야합니다.

이제 경제적 인간을 통한 도피는 그만두고 현실을 직시할 때입니다.

 

"무엇이 의존이고 누가 누구에게 기생해서 사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항상 정치적인 문제였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도 그 관계와는 별도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색다른 시각에서 나온 날카로운 비판과 통찰이 돋보였던 책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였습니다.